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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의 시작

한국전쟁으로 한반도가 난리통이 되었던 1950년대 초, 한국에 있는 자동차는 주한 미군이 타던 자동차가 거의 전부였습니다.

그 무렵 자동차 정비로 밥벌이가 든든했던 '최무성'과 두 동생은 폐차된 미군 월리스 MB 지프의 부품을 모으다가 개조차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엔지에 관심이 많았던 '김영삼'을 영입해, 주운 부품 말고 리얼 자체 제작 엔진을 만드는 데 성공하는데요 그렇게 국내 제작 엔진까지 품으로 역대 최초의 국산 자동차 '시발'이 탄생합니다.

왜 시발인가?

시발 자동차의 시발은 친근한 그 시발이 아니라 첫출발을 뜻하는 '시발(始發)'입니다.

시발 자동차의 TV광고 음악도 재미있는데요 "시발 시발 우리의 시발, 시발 시발 우리의 시발 자동차를 타고 삼천리를 달리자'

당시 이 음악은 제법 재미있게 다가왔는지 방송국 옥외 스피커가 있던 서울 종로 부근에는 하루 종일 "시발 시발"이 들려왔을 정도로 아이들이 흥얼거리며 다녔다고 하네요

시발 스펙

미군 지프차를 베이스로 한 모델이다 보니 '국내 최초의 자동차'와 '국내 최초의 SUV'의 탄생인 셈인데요 하지만 2,195cc라는 높은 배기량을 자랑하면서도 최고 속도는 89km/h에 불과했습니다.

더군다나 강화유리도 없었던 탓에 비포장도로만 달리면 유리가 깨지기 일쑤였습니다.

엔진

직렬 4기통 1323cc 

변속기

전진 3단, 후진 1단 

최고속도

시속 80km 

차중

1500kg 

구동방식

4륜 구동 

하지만 1955년 10월 광복 10주년 기념 창경궁, 산업박람회에서 대통령상을 차지한 덕분에 '각하가 탄 차'라는 입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 대박행진을 시작합니다.

수작으로 만드는 수제 자동차였던 탓에 없어서 못 파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상류층에는 시발을 사기 위한 '시발계'까지 생겨났습니다.

또한 시발은 택시로도 인기가 많아 원래 이름보다 '시발택시'로 더 많이 불렸습니다.

시발 디젤버스

시발의 제조사 국제 차량 제작소는 연이은 배송 지연을 막기 위해 제대로 된 공장을 여는데요 그 과정에서 세단이라기엔 전장이 너무 길어 9인승이나 되는 왜건급 '시발 세단'도 등장합니다.

이때부터는 미군 차 부품을 주워다 만들던 초기 시발과는 달리 부품 60%를 자체 생산해 진짜 국산 자동차로 거듭나기 시작했습니다.

세단뿐 아니라 시발 픽업트럭도 있었으며 '시-발듸-젤 뻐쓰'라는 시발 버스도 제작했습니다.

시발 몰락

거침없이 질주할 것 만 같았던 시발 자동차는 정부의 거친 태클에 하락세를 타고 말았는데요 치솟은 자동차 인기에 석유 파동을 우려한 정부가 자동차 수를 제한하는 긴급조치 '5.8 대책'을 시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5.16으로 들어선 군사정권하에서 시발자동차는 일본 이스즈와 제휴해 대형버스와 트럭을 조립 생산하기 위해 무리하게 투자하면서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여기에 정부 보조금이 중단되고 1962년 시발 자동차에 비하면 훨씬 고급스러운 일본 닛산의 블루버드가 '새나라 자동차'라는 이름으로 한반도에 상륙하며 시발 자동차의 몰락에 쐐기를 박으며 화려했던 시발자동차는 쇠퇴의 길에 들어섭니다.

이후 시발자동차는 2235대를 생산한 끝에 1963년 5월 단종으로 아쉽게도 기억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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